최근 안방극장은 그야말로 ‘억’ 소리 나는 출연료 전쟁을 치르고 있다. MBC 기획시리즈 ‘집중취재, 연예인!’에서 수면 위로 끄집어낸 방송가 고액 개런티의 실체는 꽤나 충격적이다. 이제 주연급 배우들의 회당 2천만 원 출연료는 기본 중의 기본이 된 지 오래며, 심지어 1회당 1억 원을 요구하는 사례까지 등장했다. 방송사가 외주제작사에 지급하는 회당 제작비가 8천만~9천만 원 선인 것을 감안하면, 주연 배우 한두 명의 몸값이 전체 제작비의 절반 이상을 훌쩍 넘겨버리는 기형적인 구조가 굳어진 셈이다.
시청률 지상주의가 낳은 씁쓸한 악순환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선 제작 현장은 갈수록 열악해질 수밖에 없다. 치솟는 배우들의 몸값을 감당하기 위해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가족 구성원을 억지로 줄이거나 극의 흐름을 깨는 간접광고(PPL)를 무리하게 집행하게 된다. 시청자들은 결국 이름난 톱스타를 보기 위해 천편일률적인 소재와 엉성한 전개를 억지로 감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김종학 프로덕션의 박창식 이사는 최고 시청률을 찍어도 제작사가 적자를 보는 현재 구조로는 1~2년을 넘기기 힘들다며, 업계가 자멸하기 전 케이블 채널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현장의 절박한 위기감을 전했다. 여기에 공짜 성형수술이나 협찬으로 집 고치기, 연예인들의 명품 밝힘증 같은 방송가의 고질적인 관행까지 맞물려 병폐는 더욱 깊어지고 있다. 480여 개의 제작사가 마케팅에 가장 효과적인 소수 스타를 잡기 위해 벌이는 피 말리는 출혈경쟁 속에서 출연료 상한선 제정의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몰입의 가치 이러한 국내 방송가의 위기는 결국 ‘이름값’에 의존하는 얄팍한 기획 관행에서 비롯된다. 반면 탄탄한 캐릭터 구축과 배우의 깊은 몰입이 어떻게 작품의 질을 높이고 배우 자신의 전성기를 새롭게 이끄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현재 미국 안방극장에서 맹활약 중인 할리우드 배우 킴벌리 윌리엄스-페이즐리의 행보가 바로 그렇다. 1991년 영화 ‘신부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졌던 그녀는 54세가 된 올해, 자신의 과거 영화 출연작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큰 TV 쇼 흥행을 이끌며 전환점을 맞이했다. 올봄 그녀는 ABC의 드라마 ‘9-1-1: 내슈빌’의 주연을 맡는 동시에 Fox의 인기 데이트 프로그램 ‘농부, 아내를 찾다’의 진행자로 나서며 눈부신 부활을 알렸다.
가상의 인물조차 질투하게 만든 연기 열정 테네시주 프랭클린의 아늑한 노란색 집에 머물고 있는 킴벌리는 분홍색 꽃이 수놓아진 초록색 스웨터를 입고 바스툴에 앉아, 자신이 배역을 위해 얼마나 완벽한 가상의 세계를 창조해 내는지 털어놓았다. ‘9-1-1: 내슈빌’에서 남편 마크를 잃고 슬픔을 견디며 살아가는 911 상황실 요원 캐미 롤리 역을 맡은 그녀는 극도로 짙은 감정선에 몰입했다. 흥미롭게도 이 치열한 연기 열정은 실제 남편이자 유명 컨트리 가수인 브래드 페이즐리와 웃지 못할 말다툼을 낳기도 했다. 대본에 빠져 “마크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는 완벽하다”고 읊조리는 아내의 모습에 브래드가 가상의 인물을 진짜 남자로 오해해 발끈한 것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자신이 직조해 낸 캐릭터의 뒷배경을 일일이 해명해야 했지만, 이는 인물의 역사와 감정적 삶을 깊이 파고드는 그녀의 진면목을 웅변하는 대목이다.
‘스타 모시기’를 넘어 탄탄한 사전제작의 안착으로 단지 유명한 스타를 캐스팅한다고 해서 시청자의 마음을 울리는 명작이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킴벌리의 사례처럼 배우가 배역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려는 노력,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치밀한 기획이 맞물릴 때 비로소 진정한 가치가 빛을 발한다. MBC 이동기 피디 역시 무리한 고액 출연료의 훌륭한 대안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신인 배우들을 과감히 기용해 섬세한 연출과 기획력만으로 높은 시청률을 얻어낸 드라마 ‘궁’의 성공을 지목했다. 기획사들이 경쟁적으로 연예인 몸값을 높여놓고 이제 와서 무작정 ‘스타 권력화’만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본과 연출, 그리고 진정성 있는 연기자가 균형감 있게 발전할 수 있는 사전제작 시스템의 안착만이 벼랑 끝에 선 방송가를 구원할 유일한 해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