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20대 직장인 A씨는 6개월 가까이 만난 연인과 사실상 이별했다. 하지만 정확히 언제, 왜 헤어진 것인지조차 모른 채 한 달째 연락이 두절된 상태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평소와 다름없던 연인이 아무 말 없이 갑자기 연락을 끊어버린 것. 전화, 메신저, SNS 등 모든 창구가 막히며 A씨는 요즘 흔히 말하는 ‘잠수이별’을 당했다.
보통 연인들이 이별할 때는 만남을 정리하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잠수이별은 다르다. 예고도, 인사도 없이 사랑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사라진다. 남겨진 사람 입장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다른 사람이 생긴 걸까’ 등 수많은 질문이 남지만, 답을 들을 길이 없다. 이유도 모른 채 끝나버리기에, 오히려 더 힘든 감정만 남는다.
일방적인 연락두절… 회피와 자기중심적 심리의 결과
잠수이별은 문자 그대로 한쪽이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으며 연애가 끝나는 현상이다. 짧은 연애에서 자주 발생하지만, 때로는 오랜 기간 만난 커플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잠수이별을 겪은 이들은 대부분 이를 ‘가장 최악의 이별 방식’이라 꼽는다. 한때 사랑했던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이, 모든 궁금증과 감정이 미해결로 남기 때문이다.
심리 전문가들은 잠수이별이 단순한 우발적 결정이 아니라, 이미 여러 번 이별을 고민해온 과정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한다. 겉으로는 평범했지만, 내면적으로는 반복되는 다툼이나 실망, 혹은 상대방의 행동에 대한 불만이 쌓여 있었다는 것. 문제는 이런 생각을 상대에게 직접 전하지 않고, 끝까지 감춘 채 마지막 순간에 잠수를 택하는 점이다.
잠수이별을 선택한 사람들은 주로 직접적인 이별 통보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부담감이나 미안함, 혹은 갈등 상황 자체를 회피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거나 상대를 설득하는 것조차 귀찮거나 불필요하다고 여길 수 있다. 연애 과정에서 주도권을 쥐었던 쪽, 혹은 애초에 상대와의 대화를 피했던 사람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하다. 또한 과거의 힘든 이별 경험, 복수심, 경제적·환경적 요인 등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서울대 곽금주 심리학과 교수는 “잠수이별은 거절이나 갈등을 두려워하는 심리와 비슷하다”며 “직접적으로 헤어지자고 말하며 느끼는 불편함과 죄책감을 회피하고 싶은 욕구가 반영된 행동”이라고 설명한다.
반복될 수 있는 이별 방식… 자기중심성의 그림자
전문가들은 잠수이별을 반복하는 이들이 자기중심적이고 책임감이 약한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본인의 감정과 편의만 중요시해, 상대방이 겪을 아픔이나 혼란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곽 교수는 “이런 사람들은 상대가 고통받는 걸 인식하지 못하거나 외면하고,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진단한다. 우유부단한 성격 또한 직접적인 대화를 피하고 잠수를 택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한 번이라도 잠수이별을 해본 사람은 다음 연애에서도 같은 방법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에게 잠수이별은 쉽고 편한 이별 방식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반응이나 감정에는 관심이 없으니, 본인은 이별이 잘 끝났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단국대 임명호 심리학과 교수 역시 “잠수이별을 겪은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이 방법이 효과적이라 여기며, 죄책감이 들더라도 곧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깊은 상처 남기는 이별… “성숙한 정리는 최소한의 예의”
잠수이별을 당한 사람은 단순한 슬픔을 넘어 깊은 배신감과 분노, 허탈감을 느끼기 쉽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관계가 끊긴 충격이 크면, 트라우마로 남아 다음 관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임명호 교수는 “잠수이별을 당한 사람은 이별이 마치 끝나지 않은 일처럼 마음에 남아 오래도록 힘들어한다”며 “이유조차 듣지 못한 채 혼자서만 이별의 원인을 고민하게 돼, 더 큰 죄책감과 고통을 느끼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별이란 언제나 아프고 힘든 과정이지만, 최소한의 예의와 배려는 필요하다. 이유를 직접 설명하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것이 어렵다면, 단순히 이별을 통보하는 것만으로도 상대에 대한 존중을 보일 수 있다. 곽금주 교수는 “잠수이별은 과거의 모든 사랑이 무효가 되는 순간”이라며 “관계를 성숙하게 마무리하는 것은 자신과 상대, 그리고 함께했던 시간에 대한 예의”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