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에 등단한 전예진 작가가 내놓은 첫 장편소설 속 선우의 모습은 우리 주변 어딘가에 있을 법하게 낯설지가 않다. “저런 애가 딴 회사는 갈 수 있겠냐”며 코웃음 치던 팀장의 면전에 퇴사장을 날리고, 그동안 모은 돈으로 반년쯤은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단단히 벼른다. 이건 단순한 칩거를 넘어 요즘 세태를 날카롭게 찌르는 ‘자발적 고립’의 메타포에 가깝다. 하지만 세상에 고리 없는 고립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듯, 인물들은 결국 다시 어딘가로 연결되며 질긴 리얼리즘의 민낯을 기어이 드러내고 만다.
비슷한 맥락에서 2020년 창비신인소설상 출신 김유나의 첫 소설집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 역시 관계의 서늘한 틈새를 파고든다. 표제작 ‘이름 없는 마음’은 세 살 터울 남매와 그사이 남편이라는 내밀한 울타리 안에서 피어나는 끈적한 애증을 스케치한다. 작가의 말마따나 인파에 떠밀려 세상의 속도에 맞춰 계단을 쫓기듯 내려가야만 하는 사람들의 헛헛한 발소리가 7편의 단편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간의 축을 살짝 틀어보면 어떨까. 한국 SF를 묵묵히 견인해 온 듀나가 드디어 첫 장편 『몰록』을 출간했다. 무려 1994년 PC통신 시절부터 활동을 시작해 2002년 웹진에 연재했던 이 작품이 이제야 단행본의 물성을 입고 세상에 나왔다. 20세기 환태평양 대지진 이후를 가상한 국제도시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연쇄살인 사건이라니, 대체역사의 외피를 두른 채 파헤쳐지는 진실이 꽤나 묵직하게 다가온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요시모토 바나나가 2021년에 묶어낸 소설집 『손모아 장갑과 가여움』을 통해 이별이라는 보편적 테마를 특유의 감각으로 건드린다. 남자친구의 죽은 여동생과 닮았다는 기막힌 이유로 결혼을 결사반대하던 양가 어머니들이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나고, 남겨진 ‘나’는 기어코 신혼여행을 떠난다. 상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새살처럼 돋아나는 또 다른 인연의 이야기다. 한편 『진주 귀고리 소녀』로 국내 독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신작 『글래스메이커』에서 15세기 베네치아로 시선을 돌린다. 당시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유리 세공 가업을 짊어지게 된 한 여성의 파란만장한 삶이 당대 실존 인물들과 유기적으로 얽히며 역사소설 특유의 입체감과 생동감을 빚어낸다.
이렇듯 현실과 역사의 지평을 넓히는 드라마가 한 축을 담당한다면, 다가오는 2026년 5월 영미권 출판 시장은 아예 시공간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거대한 장르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형국이다.
닐 아셔의 SF 『다크 에이전트(Dark Agent)』는 타임즈 섀도우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으로, 폴리티 우주를 무대로 스패터제이 바이러스로 군대를 조직한 알 스트래거와 요산더스 홀드에서 끝없는 고군분투를 이어가는 블라이트, 코맥의 장대한 서사를 전개한다. 반면 니컬러스 빈지의 호러 중편 『어비스(Abyss)』는 직장인들의 등골을 빼먹는 기묘한 기시감이 압권이다. ‘세브란스’와 러브크래프트의 기괴한 만남이랄까. 미스터리한 포노스 컴퍼니에 일개 행정직으로 입사한 조가 마주하는 사무실 이면의 심연은 일상적인 공포를 극한으로 끌어올린다.
판타지와 게임적 상상력이 결합된 텍스트들은 한층 더 도발적인 태도를 취한다. 세라 리스 브레넌의 『올 헤일 카오스(All Hail Chaos)』는 아예 자신이 텍스트로만 읽던 판타지 세계의 악녀로 빙의해버린 레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언데드 군단이 몰려오는 와중에 자신을 기어코 황비로 앉히려는 황제 사이에서 구르는 맵단짠 서사가 돋보인다. 맷 디니먼의 폭발적인 LitRPG 시리즈 8권 『어 퍼레이드 오브 호러블스(A Parade of Horribles)』에서는 칼과 도넛 공주가 10층의 레이스를 뚫고 11층의 끔찍한 퍼레이드를 마주하며 다시 한번 피 튀기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여기에 짐 부처의 『아웃 로(Out Law)』도 빼놓을 수 없는 수작이다. ‘트웰브 먼스’ 사태 이후의 드레스덴 파일을 다루는 이 중편에서 해리 드레스덴은 존 마르콘의 압박에 못 이겨 사건에 뛰어들고, 자신이 과거에 만들어냈을지도 모를 악마적 존재와 엎치락뒤치락하며 시카고 전투의 후일담을 거칠게 이어간다. 현실 자체가 거대한 통제구역이라는 설정의 토머스 엘로드 신작 『더 프랜차이즈(The Franchise)』는 또 다른 의미에서 흥미롭다. 마법과 드래곤이 난무하는 맬리칸이라는 판타지 세계가 사실은 ‘트루먼 쇼’처럼 정교하게 꾸며진 블록버스터 영화 세트장이며, 등장인물들은 그 허구의 삶을 진짜라 믿고 살아간다는 설정이 뒷통수를 얼얼하게 만든다.
디스토피아나 아포칼립스를 다루는 방식도 묘하게 결이 달라지고 있다. 제인 플렛의 문학적 아포칼립스 소설 『웰컴 투 더 카오스캄프(Welcome to the Chaoskampf)』는 안락한 삶을 내던진 마시가 종말을 부르짖는 광신적인 영화 제작자 무리와 얽히는 과정을 좇는다. 어릴 적 복싱하다 생긴 흉터 하나 때문에 덜컥 ‘선택받은 자’로 추앙받는 기묘한 부조리함이 이 텍스트의 묘미다. 대니 프랜시스의 『브로큰 도브(Broken Dove)』는 실버 엘리트 내부에서 정체가 탄로 난 이중첩자 렌이 반란군을 도우며 크로스와 그레이슨이라는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디스토피아 특유의 서늘한 로맨스를 얹어냈다. 웰니스 트렌드를 고딕 호러로 비틀어버린 세라 게일리의 『메이크 미 베터(Make Me Better)』는 소속감을 찾아 외딴섬의 소금 축제로 떠난 실리아가 치유와 변신을 빙자한 섬뜩한 공동체의 늪에 빠져드는 과정을 숨 막히게 그려낸다.
이 무한한 상상력의 궤도 끝자락은 다시금 고전의 변주가 장식한다. L. 프랭크 바움의 오즈 시리즈에서 영감을 받아 에이드리언 차이코프스키 등 굵직한 작가들이 참여한 단편집 『옴니보즈(Omniboz)』, 그리고 고립된 여성들의 섬에서 자라 갤러호트와의 사랑과 카멜롯의 어지러운 정치판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란슬롯의 퀴어 서사를 새로 쓴 존 글린의 아서왕 판타지 『더 로스트 북 오브 란슬롯(The Lost Book of Lancelot)』까지. 현실의 방구석에서 시작된 고립의 텍스트가 어느새 우주의 심연과 마법의 세트장을 거쳐 다시 우리의 가장 취약한 내면으로 회귀하는 듯한 기분이다. 텍스트가 구축한 세계들은 이토록 불완전하고 또 다채롭기에, 활자 사이의 공백을 기꺼이 유영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